열린마당
멸종위기 야생동물 고라니 얼굴이 담긴 사진. 볼 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진 옆 ‘촉각 작품’을 만지면 입체적인 고라니 얼굴의 형태가 손끝에 느껴진다. 들을 수도 있다. 오디오 해설 이어폰을 쓰면 남자와 여자, 청소년이 각각 표현하는 고라니를 들을 수 있다. 천사 형태의 조각은 한 손이 사라져있는데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소멸’의 의미가 담긴 비누조각이다. 원형 좌대에 있는 조각은 만질 수 있다. 각기 다른 소재로 만들어진 조각을 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촉각으로 느끼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본다’는 감각 외 다른 감각들을 일깨워 예술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무장애 작품들이다. 이강하미술관이 장애인, 비장애인,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이용 가능한 ‘모두의 미술관’으로 변신했다. 볼 수 없지만 만질 수 있는 방식과 들을 순 없지만 볼 수 있는 감각, 그리고 감정을 통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모두의 미술, 소리와 미술관’ 전시가 20일 시작됐다.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2025년 무장애 문화향유 활성화 지원사업으로 추진된 이번 전시는 장애인·비장애인이 미술관에서 만나 예술적 경험과 일상적 활동을 연결해 문화적 포용과 다양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주로 수도권에서 진행되는 전시지만 광주에서는 이강하미술관이 유일하게 공모에 응하면서 추진됐다.
참여작가 문선희(사진), 신미경(조각), 장전 프로젝트(AI미디어아트)는 기존 작품을 새롭게 무장애 전시 작품으로 재구성, 타자의 몸에 전달되는 또 다른 감각을 확장해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문선희 작가의 ‘라니’는 2013년부터 10여년간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멸종위기 야생동물 고라니 얼굴을 찍은 사진작품이다. 카메라와 시선을 마주한 고라니의 얼굴과 눈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뿐인 생명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관람객은 사진 옆 ‘촉각작품’을 만지며 고라니의 얼굴 형태를 손끝으로 느낄 수 있다. 오디오 해설은 ‘라니’ 작품을 보고 묘사한 각기 다른 표현을 들려준다. 신미경 작가의 ‘천사’, ‘풍화 프로젝트’, ‘육신을 떠난 영혼’은 비누와 레진, 석고 붕대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조각이다. 영국과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미경 작가는 비누를 이용해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상을 비롯해 아시아의 불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적 생산물들을 재현해왔다. 작품의 겉모습은 오래된 돌로 만든 유물처럼 보이지만, 비누로 만들어져 시간이 지나면 녹거나 닳아 없어질 수 있다. 전시된 ‘천사 시리즈’도 한쪽 팔이 닳아져 사라진 조각이 포함돼 있다. 원형 좌대에 설치된 ‘풍화 프로젝트’와 ‘육신을 떠난 영혼’은 방석에 앉아서 직접 조각을 만져봄으로써 익숙하지만 낯선 경험을 제공한다. 신 작가의 ‘화장실 프로젝트’도 접할 수 있다. 미술관 한쪽 싱크대에 작가의 비누조각 작품을 설치, 관람객이 작품을 비누처럼 사용하면서 마모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화장실 프로젝트’는 지난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통해 광주송정역에서 진행되기도 했다. 장전 프로젝트(장준영&전지윤)의 ‘랜덤 포레스트’는 인간의 감정과 인공지능의 조응을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2021년 ‘포스트휴먼 앙상블’에서 선보인 작품을 영상, 인공기능 감정분석, 안면인식, 사운드 등 최신 컴퓨터 기술을 활용해 무장애 작품으로 재제작했다. 카메라 앞에 서면 AI가 관람객의 감정을 읽어내고 이를 다양한 영상으로 보여준다. 이강하미술관은 이번 무장애 전시를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장애 관람객에게는 보다 쉬운 설명을 하고 비장애 관람객들에게는 다각적인 이해도를 높이는데 초점을 맞췄다. 쉬운 말과 푸른빛차콜색의 큰 글씨로 안내문을 만들었고 광주점자도서관과 협력해 점자와 묵자를 묶은 설명서를 책자로 제작했다. 수화 해설 영상도 미술관에서 직접 촬영했다. 장애인 관람객의 이용을 위해 미술관에 접근성 매니저도 상주한다. 이번 전시 과정을 또 다른 결과물로 만들기 위한 모니터링도 진행하며 전시연계 프로그램으로 문선희 작가의 북토크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선 이강하미술관 학예실장은 “우리의 겉모습은 다르지만 각자가 경험한 감각과 감정이 예술이라는 문을 통해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바람에서 전시를 기획했다”면서 “볼 수 없지만 만질 수 있는 방식, 들을 순 없지만 볼 수 있는 감각, 감정을 통해 전시에 설치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다각적인 방법을 고민했다”고 밝혔다. 전시는 10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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