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의 첫인상은 배려였다.
바닥에 깔린 점자 블록과 큰 글씨 안내문, 점자 촉지도가 이번 전시의 성격을 단번에 보여주듯 놓여 있었다.
수어 해설 영상과 작품 음성 해설, 점자 워크북, 휴식 공간까지 더해진 구성은 이 전시가 단순히 ‘오감을 자극하는 체험형 전시’가 아니라, 누구나 미술관에서 동등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획됐음을 알게 한다.
이강하미술관이 마련한 기획전 ‘모두의 미술, 소리와 미술관’이 오는 10월30일까지 열린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무장애 문화향유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이번 전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어린이와 노년층까지 모두가 함께 향유할 수 있는 ‘모두의 전시’를 지향한다.
이선 학예실장은 “특별한 대상만을 위한 기획이 아니라, 모두가 동등하게 향유할 수 있는 전시를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문선희 작가는 10여 년간 촬영해온 고라니 사진 ‘라니’를 통해 생명의 존엄을 전한다.
문선희作 ‘라니109’
전시장 벽면에 걸린 고라니 얼굴들은 하나하나 초상사진처럼 관람객과 마주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고라니의 눈, 귀, 이빨 같은 특징을 입체적으로 재현한 ‘촉각 작품’을 함께 선보여 시각장애인도 손끝으로 얼굴의 형태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작품 옆에는 중년 남성과 여성, 청소년 목소리로 제작된 음성 해설이 제공돼 사진을 상상으로 ‘보는’ 경험을 확장시킨다.
다음 공간에서는 신미경 작가의 조각 작품이 관람객을 기다린다.
일상적 재료인 비누로 재현한 조각은 겉으로는 고대 유물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닳아 사라지는 물체다. 관람객은 이를 직접 만지고, 냄새를 맡으며, 전시장에 설치된 세면대에서 손을 씻어보기도 한다. 전시장 중앙에는 석고붕대, 레진으로 캐스팅한 ‘풍화’ 시리즈 작품들도 있어 손으로 만지며 익숙하지만 낯선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신미경作 ‘풍화 시리즈’
장전프로젝트(장준영·전지윤)의 미디어아트 작품 ‘랜덤 포레스트’는 인간의 감정을 데이터로 시각화한다.
관람객이 화면 앞에 서면 카메라가 표정을 인식해 인공지능이 감정을 분석하고, 이에 따라 영상과 사운드가 실시간으로 변한다. 평온하면 물결이 잔잔해지고, 기쁨에는 물이 끓어오르며, 화난 표정에는 얼음이 굳어버린다.
시각장애인은 소리로, 청각장애인은 화면으로 감정의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조건이 작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순간이다.
전시장을 둘러보는 동안 미술관이 얼마나 세심하게 모든 이를 고려했는지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관람객이 누구든 작품과 만날 수 있도록 마련된 장치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미술관이 지향하는 철학과도 맞닿아있다.
이선 학예실장은 “전시는 결국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하는 자리”라며 “사회가 구분해온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넘어 모두가 동등하게 예술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 최명진 기자
